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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디어아트의 정의와 1900년대 역사 - 1

미디어아트 정의
미디어아트 또는 융합 예술은 사진, 전화, 영화 등의 발명 이후 이런 신기술들을 활용하는 예술 들을 가리킨다.
뉴 미디어아트라고도 불리며 매체 예술로 번역된다.

새로운 화학, 기계 등의 기술을 사용한 새로운 매체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로 정의되고 있다. 1960년대 텔레비전과 방송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가 도래한 이후에는 위성방송, 인터넷, 웹사이트, 컴퓨터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CD-Rom, DVD, 가상현실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이 중에서 컴퓨터나 인터넷 등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고 탐구하는 예술을 뉴 미디어 아트라고 용어로 지칭하기도 한다. 뉴 미디어아트라는 용어는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와 뚜렷이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뉴 미디어'라는 용어 자체가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에 부적합하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과거에는 비디오가 새로운 매체였지만, 오늘날에는 CD나 USB조차 기성 매체가 되었다. 사실 뉴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 자체도 매우 광의적이고 모호한 용어이다. 넓게는 퍼포먼스나 바디 아트 역시 미디어 아트에 포함될 수 있다. 이는 넷 아트, 웹 아트, 상호작용 예술 등의 용어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용어 정의의 모호성은 아직 이러한 예술이 진행되는 단계에 있어 관련자(작가, 관객, 대중, 평론가, 예술 시장 등)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다양성과 혼 종성이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문화의 일면이기도 하다.

미디어 아트가 기존의 예술과 다른 점은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있다. 전통적인 예술, 즉 회화나 조각은 정적인 제작물로서 심리적 상호 소통이 우선적인 데 비해서 미디어 아트는 대중 매체를 이용함으로써 심리적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를 통한 물질적인 상호작용도 일어난다. 대중과의 소통이 은유적인 것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바뀐 것이다. 대중 매체가 발달한 오늘날 미디어 아트는 단순한 예술을 넘어서 일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19세기의 미디어아트
산업혁명 이전에도 시계 장치를 활용한 자동 인형과 같은 기계 매체는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계 매체가 도래하고 인류 사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였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기차와 증기선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이는 물자의 수송과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 동시에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확대가 심화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런던과 파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이전 인쇄술의 발전과 맞물려 신문이라는 대중 매체의 영향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1830년대에 다게 레오 타입 사진 등의 발명으로 이미지의 기계 복제가 가능해졌고, 이어 1890년대에 영화가 발명되면서 대중 매체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에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진이나 영화는 소수의 기술자에 의해 운용되었고, 자본의 힘 없이는 제작되기 힘들었다. 아이젠슈타인 등 일부 선구적인 영화감독들이 영화의 미학을 정의하기 시작했으나, 기존 예술계는 여전히 회화나 조각 같은 기존 매체에 머물러 있었다.

20세기 초의 미디어아트
1차 대전과 대공황 시기에 영화 산업에서 유럽 국가들은 타격을 입게 되고, 대신 미국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순수 예술계에서는 영화를 예술로써 인정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영화가 전시되었다. 이러다 보니 영화는 개인 예술가가 아닌 영화 제작 집단 중심으로 발전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한편 전쟁 시기에 군대는 암호 해독 기술의 발전이 필요했고, 이는 컴퓨터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앨런 튜링은 현대 컴퓨터의 메커니즘을 정립했다.

1940년대 미디어아트
20세기 이전에도 라이프니츠 계산기나 방직기 등에서 이진법의 원리가 활용되었으나, 이러한 기술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본격적으로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이다. 이때의 군대는 독일 암호 해독과 관련해 각종 공학 기술의 발전을 요구했으며, 공학 기술은 지식이나 과학의 집합체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앨런 튜링은 오늘날의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되는 튜링 머신의 개념을 정립했다.

1950년대
1950년대에 에니악과 같은 컴퓨터가 등장하고, 군사 기술과 연관된 연구소를 중심으로 컴퓨터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소들에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연구에 참여했고, 이들은 공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미적 영감을 받고 그것에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응용의 결과 관객의 참여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들, 신체 행위를 접목한 예술, 컴퓨터 음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학자들은 공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인공 두뇌학에 관한 미래적인 관념 들을 연구,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196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가들이 기계 매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존 케이지'가 있는데, 그는 작가와 관객의 상호 작용성, 멀티미디어, 그리고 일렉트로닉스를 예술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플럭서스 출신의 예술가 백남준은 최초로 소니 포 타 팩 비디오를 가지고 비디오아트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울프 포스텔',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비디오카메라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아닌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단순히 전자회로 이미지를 조작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컴퓨터 기술을 예술적으로 탐구한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가가 아닌 공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군사 관련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를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초, 세계 최초로 인간과 컴퓨터가 소통할 수 있는 상호 작용 적인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개발되었다. 이른바 GUI(Graphic User Interface)의 기본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60년대 후반에는 컴퓨터나 비디오, 공학의 융합으로 공학 기술 덕분에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시스템 미학이라는 이상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에 예술가, 작곡가, 영화감독, 과학자, 건축가, 디자이너 등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새로운 공학과 예술의 융합에 대한 장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시스템 아트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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