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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디어 아트 - 팝아티스트들 02

01. 영국의 팝아티스트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의 팝 아트 화가로, 요크셔의 브래포드에서 출생해 브래포드 미술학교, 왕립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63년 런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통속적인 스타일을 극히 세련된 방식으로 이용해, 스냅 사진과 같은 정경을 그렸다. 판화 작업도 많이 했으며, 1964년부터 67년에 걸쳐 미국의 몇 개 대학에서 가르쳤다. 

 

 

<앨런 존스>
존스는 1960년대 후반 영국 팝 아트 운동과 관련하여, 캐스 스컬프처 파운데이션(Cass Sculpture Foundation)은 존스의 작품에 대해 "평평한 캔버스에서 그려진 형상은 조각처럼 보이고, 3차원 작품은 회화적이다"고 평가하였다. [3] 리소그래피와 회화, 드로잉, 조각 작업으로 유명하며, 그는 형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색상을 사용한다. 가끔은 생생한 정밀함으로 묘사하거나 거꾸로 직접적인 표현에 가까운 자유로운 몸짓이나 에너지로 작업한다. 테이트는 리소그래피는 "존스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매체임을 증명했다"며 존스의 리소그래피 작업을 "풍부하다"고 평가하였다. [4] 알렉산더 매퀸이나 잇세이 미야케(Issey Miyake), 리처드 니콜(Richard Nicoll) 등의 아티스트와 패션 디자이너는 존스가 자신의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5]
존스는 고무 페티시와 BDSM을 포함한 에로틱한 이미지를 그의 작품에 삽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성적 표현은 종종 예술 비평가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피터 블레이크>
피터 블레이크는 데이비드 호크니, 로널드 브룩스 키타이와 함께 '젊은 현대 미술가전'에 참여했던 1961년부터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1961)으로 존 무어스 리버풀 전시회(1961)에서 상을 받았다. 현재 이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 모던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블레이크는 팝 아트의 대표적인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시각 예술을 대중을 위한 예술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 그는 팝 음악과의 관계로 미술계 외부에서 오히려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블레이크는 비틀즈의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1967)의 앨범 디자인과 '라이브 에이드'의 포스터 제작, 폴 웰러와 오아시스의 앨범 디자인을 했다.

블레이크는 열네 살에 켄트의 그레이브젠드 공과대학 주니어 아트 스쿨에서 정식으로 미술 교육받기 시작해, 1956년에 런던의 왕립미술 칼리지에 진학했다. 그 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세인트 마틴스 미술학교와 해로 미술학교, 월섬스토 미술학교, 그리고 왕립미술 칼리지 등 여러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블레이크는 1969년에 영국 배스 근처에 있는 휴업 상태의 철도역에 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그는 농촌 주의 미술가 협회를 조직했다. 이 미술가 협회는 팝 아트보다 민속 미술 쪽으로 더 이끌렸던 미술가들의 그룹으로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여전히 팝 미술의 창시자로서 더욱 유명하다.


02. 네오 다다이스트 팝아티스트


<로버트 라우센버그>
몇십 년에 걸쳐 열정적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해온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전후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추상표현주의의 무거운 고뇌로부터 팝 아트의 무감각한 표면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그의 능력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성취는 그것과 관련된 트렌드들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1940년대 후반 전설적인 블랙마운틴 대학에서 화가로서의 수련을 쌓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우센버그는 뉴욕 화단에서 악명을 얻게 되었다. (1951)이 전시됐을 때 사람들은 즉시 이 작품을 젊은 반항아의 별 이유 없는 제스처로 받아들였다.
그는 (1953)으로 '무서운 아이'(enfant terrible)라는 초기의 별명을 확고히 했다. 1954년부터 라우센버그는 '콤바인'(combine)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콤바인 회화는 사진을 포함한 실제 사물을 채색된 화면에 붙이거나 결합한 것으로, 이렇게 매우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을 한데 모음으로써 각각의 미적 계급의 차이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라우센버그의 작품에서 봉제 동물 인형은 낡은 양말, 1950년대 카툰, 고철, 옛 대가의 작품, 친구의 드로잉, 떨어뜨린 물감, 가족사진들과 회화 공간을 공유한다. 결정적으로 콤바인 회화는 그림을 지각 경험(끝에서 끝은 인간의 시야와 일치함)의 유사함으로부터, 모든 데이터가 처리되는 전환 소인 정신을 위한 일종의 다이어그램으로 이동시켰다.
1950년대 말, 라우센버그는 용해제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옮기는 방식으로,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 삽화를 그렸다. 그는 「지옥편」(1308~1321) 가운데서 34편의 시를 골라 수채 물감, 연필, 색분필, 사진을 이용해 유명한 34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또한 1962년에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방문한 후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차용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라우센버그는 196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받았는데,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받은 상이었다.

 

 


<재스퍼 존스>
재스퍼 존스는 1930년 미국 조지아주(州) 오거스타에서 태어났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마을 앨런데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1949년 파슨스디자인학교를 다녔다. 1952년부터 1953년 사이에는 한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4년 뉴욕으로 돌아와서 화가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무용수이며 안무가인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등과 교류했다.

존스는 1954년과 1955년에 미국 국기 그림 《깃발》을 제작했다. 가장 호소력 있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깃발을 채택해 거기서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깃발 문양의 상태만으로 만들어, 이것이 깃발인가 아니면 깃발 그림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그림을 본 뉴욕의 미술상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는 "대단한 천재의 증거를 보았으며, 다른 어떤 것들과도 무관한 완전한 신선함이었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존스는 1958년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존스가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국기, 과녁, 지도, 숫자, 알파벳 등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안료에 고착제 역할을 하는 뜨거운 밀랍을 섞는 납화법을 이용하여 작품이 인위적이며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상처럼 보이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그려진 화면이자 동시에 이차원적 평면성을 지닌 오브제라고 하는 이중 구조적 특색을 지닌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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