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팝아티스트]
01. 앤디 워홀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1949년)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연재만화의 인물 시리즈를 그렸다. 그러나 고상한 예술만을 중시하던 당시 뉴욕의 화상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1962년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 New Realists' 전시에 참여해 주목받았다.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다.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워홀은 그것을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조수들과 함께 대량 생산하였다.
워홀은 1963년 첫 영화 《잠 Sleep》을 촬영하였다. 1965년에는 영화 만드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회화와의 작별을 선언하였다. 그는 총 28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1968년 팩토리 일원이자 그의 실험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던 발레리 솔라나스에 의해 저격당하고 극적으로 살아났다. 솔라니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주요 작품은 《캠벨 수프 Campbell's soup》(1962), 《두 개의 마릴린 The two Marilyns》(1962),《재키 Jackie》(1964), 《마오 Mao》(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등의 실크스크린과 영화 《잠 Sleep》(1963), 《엠파이어 Empire》(1964),《첼시의 소녀들 The Chelsea Girls》(1966) 등이 있다.
02.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짧게 공부한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공부했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군 복무를 한 후,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으로 돌아가 석사학위를 받았다.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상업미술가, 쇼윈도 디스플레이, 가르치는 일 등의 여러 가지 파트타임 일들을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1950년대 말에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1961년에 작업 방향을 수정해 자신만의 특색 있는 방식으로 만화 캐릭터와 상업적인 이미지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62년 뉴욕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대중매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리히텐슈타인의 커다란 그림들은 일상 용품들의 광고 이미지와 만화의 일부분들을 확대한 것으로, 두꺼운 검은 윤곽선들과 역동적인 구성이 특징이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싸구려 인쇄물의 연재만화에서처럼, 리히텐슈타인은 원색 점들로 색과 색조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신문의 연재만화보다는 크기가 훨씬 컸기 때문에, 그는 이 원색 점들을 스텐실을 이용하여 표현했다. 이 점들은 삽화가 벤저민 데이(1838~1916)의 이름을 따서 '벤데이 점'(Benday Dots)이라고 불린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상화되었고, 텍스트는 모호해졌다. 강한 원색이나 흑백을 사용한 작품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있는 패턴으로 쉽게 전환된다.
앤디 워홀 같은 동시대 팝 미술가들처럼 리히텐슈타인도 창조적인 천재라는 예술가상을 버리고 전통적인 고급 미술의 중요성에 도전했다. 이를 통해 그는 대중문화의 전형적이고 진부한 이미지들을 생산해냈다. 또한 그는 채색한 플라스틱, 놋쇠, 에나멜을 칠한 금속 조각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의 믿을 수 없이 단순한 그림들은 복잡한 구성과 세심하고 정확한 드로잉과 채색을 통해 삶에 대한 풍자적인 통찰을 수행한다.
03. 클래스 올덴버그
클래스 올덴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적인 상업 이미지를 작업에 응용했던 뉴욕의 많은 젊은 미술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앨런 캐프로의 해프닝을 위한 소도구를 만드는 데 참여했던 올덴버그는 혼응지(펄프에 아교를 섞어 만든 종이 - 옮긴이)와 비슷한 가정의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채색한 회반죽과 철망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1961)를 만들기 시작해, 이 일상적인 미술 상품들을 판매했다. 이 독특한 프로젝트는 '미국 슈퍼마켓'(1964)이란 전시회의 전조가 되었다. 올덴버그와 로이 릭텐스타인 같은 다른 팝 미술가들이 참가한 이 전시회에서는 음식물 아이템들의 전형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올덴버그는 1962년에 첫 '부드러운 조각품'(soft sculpture)을 제작했다. 그는 캔버스나 비닐로 형태를 만들고, 스펀지 고무로 속을 채운 거대한 작품들은 진부한 일상의 물건들을 고급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상업주의, 대량생산, 패스트푸드 문화, 평범한 대상의 신격화라는 이슈들을 탐구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962)을 꼽을 수 있다.
올덴버그는 1960년대 내내 (1963), (1966)와 욕실 연작인 (1966), (1966), (1966), (1966) 같은 부드러운 조각들을 제작했다. 그 후 올덴버그는 거대한 공공기념물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66) 같은 작품에서 익숙한 풍경에 일상적인 사물들을 삽입함으로써 반(反)기념비적인 스케치와 콜라주들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제작한 그의 첫 조각품 (1969)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예일 대학에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올덴버그는 (1976), (1986), (1996), (2001) 등의 기념물들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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