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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술가별 작품소개 - 알브레히트 뒤러와 파블로 피카소

<알브레히트 뒤러>

 

 

01. 뒤러의 코뿔소
《뒤러의 코뿔소》(Dürer's Rhinoceros)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르네상스 시대인 1515년에 제작한 목판화이다. 그림은 1515년 초 리스본에 도착한 인도코뿔소를 보고 어느 화가가 묘사한 글과 간단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뒤러의 목판화는 코뿔소의 정확한 모습을 묘사하지 못했다. 뒤러는 코뿔소를 목에는 고지트, 가슴 쪽에는 흉갑, 그 사이를 잇는 리벳이 있는 갑옷같이 딱딱한 판으로 몸이 둘러싸인 동물로 묘사하였다. 또, 코뿔소의 등에 뒤틀린 작은 뿔을 그렸고, 비늘로 뒤덮어진 다리와 톱과 같이 뾰족한 엉덩이도 그렸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특징은 코뿔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구조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뒤러의 코뿔소는 유럽에서 매우 유명해졌고, 그 후 3세기 동안 많은 복사본들이 판매되었다. 서양인들은 18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 그것을 진짜 코뿔소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결국은 1740년대에서 1750년대 사이에 유럽을 돌아다닌 클라라라는 코뿔소를 그린 그림과 같은 더 현실적이고 세밀한 그림들이 뒤러의 코뿔소를 대신하게 되었다. 뒤러의 목판화는 "아마 어떤 동물 그림도 예술에 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된다.

한편, 로마 제국 시절 이후 유럽에서 살아 있는 코뿔소가 목격된 것은 처음이었다. 뒤러가 그린 코뿔소는 1515년 말에 포르투갈의 왕인 마누엘 1세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선물로 보냈던 것이나, 1516년 초에 이탈리아의 해안에서 난파를 당해 죽었다. 그 이후로 1577년 인도에서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의 궁중으로 와서 1580년경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된 아바다라는 코뿔소가 올 때까지 유럽에서 살아있는 코뿔소를 다시 볼 수 없었다.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01. 게르니카
〈게르니카〉(Guernica)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250~1,600명 그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또한 부상당하였다.

거대한 벽화의 형상을 띤 이 그림은 사실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도록 스페인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그림은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의뢰된 것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게르니카의 참상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폭격의 공포와 피카소가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근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 체제에 대해 엘리트로서 느꼈던 비애도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크기는 349.3 X 776.6 cm 이고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 되어있다.  그림에는 부상당한 사람들과 절규하는 사람들 등이 그려져 있으며,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아비뇽의 처녀들

02.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피카소가 1907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뉴욕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이 작품은 작가 피카소의 화력(畵歷)에 중요한 전기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초기의 피카소가 즐겨 그린 인생적인 주제가 답습되어 있는 셈인데 이 작품에는 벌써 청색 시대의 정감적(情感的)인 침울함이 없고, 대상은 주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비정(非情) 형태의 구성으로 포착하였다. 이것은 피카소가 스스로 제작에 가한 제1의 파괴인 것이다. 이 파괴의 힌트는 피카소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의 흑인 조각에서 얻었다. 이들 원시 미술이 가진 분방한 데포르메와 충실된 양감은 무엇보다도 형(形)을 만드는 것, 즉 조형의 문제로서 정감적인 피카소를 경탄하게 하였고 매혹시켰다. 또 하나의 힌트는 세잔에게서 받았다. 세잔도 역시 현상과는 별개의 실재(實在)를 화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색면(色面)으로써 견고하게 구축할 것을 염원하였던 조형가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에 이 세잔의 《수욕(水浴)》의 구도를 모방하여 나부(裸婦)의 군상을 그리려던 목적이라 말하지만, 세잔의 주체적인 색면 배합을 진일보하여 피카소는 형태의 분해와 화가의 내적인 질서에 따르는 그 재배분(再配分)을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피카소의 조형에 대한 사고는 그 그림을 그린 당시에 있어서 친한 친구에게조차 잘 이해되지 않았다. 피카소는 머리가 돌아서 그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브라크만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브라크도 역시 세잔의 본을 따라 풍경화 가운데에 있는 색면에 의한 양(量)의 파악과 대상의 재구성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윽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공동연구에서 퀴비슴의 사조(思潮)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의 모방을 근저로부터 뒤집어 엎는 이지(理知)의 조형이며 20세기의 회화가 달성한 주목할 만한 혁신이다

 

 

 

 


03. 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에서의 학살(스페인어: Masacre en Corea)은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 그린 그림으로 6.25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캔버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철갑 투구의 병사들이 있다. 파블로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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