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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디어아트 - 아티스트들

[미디어아트  - 아티스트]

 

 

01. 빌 비올라
1970년대 초반 슈퍼-8 필름과 흑백 비디오로 작품을 시작해 지금까지 수많은 영상작품과 멀티미디어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의 예술 근원은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경의와 깊은 성찰이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 수피와 선(Zen) 신비주의에 대해 연구했으며, 전통 공연예술을 기록하기 위해 솔로몬 아일랜드, 자바, 티베트 등을 여행하기도 했다. 특히 1980년 일본에서 18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선불교승이자 화가였던 다이엔 타나카(Daien Tanaka)와 교류하며 자신의 작업이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시기 소니사의 아츄기 연구소의 거주 작가로 지내면서 그의 영상작업의 특징인 '느림의 미학'을 구축하게 되었다.

비올라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 의존한다. 자신의 체험과 사유를 통해 얻어진 작업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다. 마치 성스러운 종교화를 대하는 것처럼 관객을 경건과 경이로움, 그리고 진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그의 작품은 가장 사실적이고 물질적인 재료(비디오)를 통해 지극히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 모션은 특정한 시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전이시키고, 시간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현실을 비껴서 그 너머의 세계를 사유하게 한다.

그의 주요 작품에는 《낭트 삼면화 Nantes Triptych》(1992), 《교차 The Crossing》(1996), 《보이지 않는 5중주 The Quintet of the Unseen》(2000), 《증인 Witness》(2001), 《의식 Observance》(2002), 《연인들 The Lovers》(2004) 등이 있다.


02. 앨런 캐프로
캐프로는 추상표현주의의 허풍을 장려하는 경향을 매우 싫어한 몇 안 되는 미술가 중 한 명이다. 추상표현주의에 싫증난 다른 많은 미술가들이 대상의 현상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던 반면, 캐프로는 미술에 대한 수행(遂行)적인 접근법으로 주의를 돌렸다.

전위적 작곡가 존 케이지의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전인 1956년 초에 캐프로는 '액션 콜라주' 연작을 제작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경험 때문에 그는 대상에 기초한 작품을 제작하던 것에서, 실제 공간과 시간의 내재된 역학관계를 수반하는 작품으로 작업 방향을 수정했다. 캐프로는 '환경 작업'과 '해프닝' 시리즈를 발전시켰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다양한 일상 사물들의 모음으로 가득 찬 방들의 형태를 띠었다. 환경 작업과 해프닝 뒤에 숨겨진 의도 중 하나는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시킴으로써, 관람자와 그 관람자가 직면하고 있는 대상 사이에 역동적인 관계를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캐프로의 첫 번째 주요 해프닝 전시회인 '여섯 부분으로 된 열여덟 개의 해프닝'이 1959년 뉴욕의 루빈 갤러리에서 6일 동안 연출되었다. 이 해프닝은 관객들에게 그들이 있는 공간이 갤러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리는 카드들을 제공함으로써,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취지를 지녔다. 1960년대 동안 캐프로는 예술과 실제 경험 사이의 경계를 파괴하면서, 해프닝을 일상생활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었다. 다른 어떤 미술가들보다 캐프로는 예술과 삶 사이의 틈에 존재하는, 시사하는 바가 많고 도전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런 작업을 한 최초의 미술가는 로버트 라우셴버그다.


 

03. 백남준
1958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 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평생의 예술적 동지인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60년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forte’를 발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으며, 머리를 샴푸시키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와 첫 만남을 갖고 플럭서스(Fluxus)의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이후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액션뮤직 프로그램으로 ‘심플 Simple’ 퍼포먼스 초연, 쾰른에서 ‘머리를 위한 참선 Zen for Head’, ‘플라토니크 3번 습작 Etude Platonique No.3’ 등을 공연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가 요제프 보이스에 의해 파괴되는 퍼포먼스를 시행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한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Sharlotte Mooreman)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1967)에서는 무어만이 상의를 드러낸 채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백남준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에서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1974년 《TV 정원 TV Garden》은 수많은 모니터의 사용을 통해 비디오 설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치 미술의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백남준은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 Focus』지의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올랐고, 같은 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이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괴테메달'을 받았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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